분류 전체보기31 상실의 이유를 찾아서 2 윤이 들어온 이래로 태우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윤이 태우 옆에 앉았다. 윤은 마르고 얼굴이 흰 아이였다. 병약해 보이기보단 예민하고 날이 선 인상이었다.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연신 짓누르는 게 영 불안해 보였다.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이 여기저기 웃돌았다. “선배, 이 누나가 우리 연극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어요.” 태우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나를 소개했다. 윤은 내 뺨 언저리를 쳐다보다 뒤늦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구면인 건 눈치챈 것 같았다. “태우가 반 협박해서 하는 거긴 하지만, 잘 부탁해. 잘해보자. 기왕 하는 거.” 내가 말했다. 내가 태우가 어떻게 연극을 구상할지 말하는 동안 윤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종종 고개를 끄덕이거나 태우와 나를.. 2025. 6. 11. 상실의 이유를 찾아서 1 -태현에게 안녕, 너는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그러지 못해. 알잖니, 나는 강인한 사람이 아니야.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일 때면 사무치게 외로워하는 사람이지. 왜인지 너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가장 위태로울 때, 내가 가장 간절할 때 나를 찾아와줬어. 나도 몰랐던 내 간절한 때에 말이야. 지나고 보니 신기해. 넌 제멋대로 나를 떠났지만, 나도 제멋대로인 건 마찬가지이니 더 탓하지 않을게. -청운 [기시감] 나는 육교를 걸을 때면 늘 몸이 저릿저릿하다. 육교 너머 차들이 달리는 걸 곁눈질하며 눈을 깜빡이고 주먹을 쉴 새 없이 피었다 쥐었다 해야 했다. 이상한 일이다. 고소공포증도 없는데 육교만 올라가면 피가 느리게 흐르는 기분에 휩싸이니 말이다. 그러다 육교에서 이상한 여자애 하나.. 2025. 6. 10. 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9 수업을 다 듣고 끝나는 대로 나는 부랴부랴 엠티 장소로 출발했다. 너무 빨리 왔는지 막상 펜션에 도착하니 우혁 선배밖에 없었다. “선배, 장보기 조는 어디 갔어요?” 바닥에 앉아 컵라면 뚜껑을 뜯던 우혁 선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어디 간 게 아니라, 아직 안 왔어. 자기들끼리 점심 먹고 온다고. 이 자식들 일찍 와있으라고 했더니 수업 듣고 온 사람들보다 늦게 오고 말이야.” 술 궤짝으로 사야 한다고 봉고차까지 대여해서 반호, 성찬, 시영, 진서 이렇게 네 명이서 장 보러 갔는데, 드라이브라도 즐기면서 오는 모양이었다. 반호와 유진서가 같이 있을 걸 생각하니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괜한 걱정을 털어버리며 벽화 스케치하러 갈 준비를 했다. “유화야, 벌써 가려고? 부지런도 하다... 2025. 6. 9. 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8 “미안해. 내가 전 여친을 잘못 둔 탓이야.” “도대체 뭐 어떻게 헤어졌길래 그 여자가 선배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난리예요.” “걔가 집착이 심해서 그래. 나는 잠깐 만날 생각으로 사귄 건데 장은수는 나랑 무슨 백년가약 맺은 것처럼 구니까.” 도형 선배가 볼을 긁었다. 이럴 때 보면 키만 컸지 철없는 소년의 모습이다. “무슨, 사귈 때부터 잠깐 만날 생각으로 사귀어요?” “나는 가능한 많은 여자를 만나자는 주의라. 남들이 하는 깊고 진지한 연애는 나랑 안 어울려.” 도형 선배가 씩 웃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나.” “용서해 주는 거야?”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 말아요.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기숙사 근처에 있는 흡연 부스로 걸어갔다. 도형 선배도 나를 따라왔다. 도형 선배는 .. 2025. 6. 8. 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7 “말이라도 고맙다.” “언니 요즘 너무 기운 없어 보여서 그렇죠. 기죽지 마요. 우리 동아리 에이스.” 그때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확인해 보니 도형 선배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옆에서 내 휴대폰 화면을 보던 율희가 물었다. “언니, 도형 선배는 어때요? 그 선배도 괜찮지 않아요?” “도형 선배는······.” 나는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어마어마한 양아치인 거 같아.” “에?” 나는 어제 머리가 뜯겼던 곳을 문질렀다. 숙취의 고통에 가려져 있고 있었다. 내가 어제 어떤 성질 더러운 여자에게 머리채를 잡혔다는 사실을. “엮이면 안 될 것 같아.” “언니가 도형 선배 마음에 든다하면,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드립치려고 했는데 아쉽네.” “그래도 반호 오빠가 똥차는 좀·.. 2025. 6. 7. 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6 “언제 갈래? 선물 사러?” “아, 어, 어머니 생신 선물?” 나한테 말을 걸 거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려온 반호의 목소리에 놀라 나는 허둥거렸다. 뒤에 훅 다가온 반호한테선 깨끗한 냄새가 났다. 나처럼 술 냄새를 지우려 아침에 열심히 씻고 나왔을까. “생신 선물? 선배 어머니 생신이세요?” 반호와 나 사이에 느닷없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진서였다. 동아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여자애. 반호와 같은 경영학과. 그리고 동아리 활동 하면서 유독 반호를 자주 쳐다보던. “응.” 반호가 심플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면 안 돼요? 저 선물 잘 고르는데, 제가 선물 고르는 센스가 있거든요.” 유진서가 반호를 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 산뜻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이 썩어.. 2025. 6. 6.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