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먹다 남은 아메리카노 두 잔이 탁자 위에서 나란히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립이 묻어 있는 방향으로 흰색 머그잔을 들었다.
“오늘 너무 많은 립스틱을 먹었어요.”
나는 인상을 쓰며 잔을 내려놓았다. 빈속에 마셨더니 커피의 쓴맛밖에 느낄 수 없었다. 몸이 점점 저릿해져 왔다. 도형 선배는 은근한 눈빛으로 내 잔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선배는 왜?”
나는 아래로 떨구던 고개를 들었다.
“여자를 너무 많이 만나서.”
도형 선배가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양아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욕했다.
“내가 왜?”
도형 선배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저녁도 안됐잖아요.”
“축하 인사를 받다 보니.”
“인기가 많네요, 아주.”
“왜 그래? 반호한테 화난 거 나한테 화풀이하지 말라고.”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도형 선배는 등을 소파에 기댔다. 사람 몸집에 맞게 푹 꺼지는 소파에서는 벌써 비 냄새가 났다.
“왜 온 거에요?”
“걱정돼서 왔지. 다 죽어간다는 소문이 있길래.”
“선배.”
“너 안색이 안 좋아. 거의 백짓장이야.”
도형 선배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그래요.”
“조반호? 설마······나는 아니겠지?”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둘이 친구니까 그냥 시원하게 말해줄래요? 힘든 사람 붙잡고 자꾸 떠보지 말고?”
“뭐? 네가 조반호한테 차인 거?”
“······직설적이네요.”
“네가 시원하게 말해달라며?”
“그래도 선배는 제대로 알고 있네요, 반호 오빠가 말해줬어요?”
“나는 말 안 해도 알아, 눈치껏. 한 명은 죽상하고 있고, 한 명은 쩔쩔매고 있으면 죽상한 쪽이 차인 거 아니겠어?”
도형 선배가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켰다.
“차인 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
“······선배는 차여본 적 있어요?”
“나는 차인 적 없지.”
“재수 없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가서 무슨 말이라도 전해줘? 아니면 대신 패줄까?”
도형 선배가 소파 손잡이를 잡고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허세는······.”
“그러니까 고백하지 말지 그랬어.”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뭐.”
“너도 확신은 없었을 텐데? 반호 걔는 숨기는 게 많은 놈이라······. 그 새끼는 지금 일밖에 몰라. 아예 거기 빠져있어, 미친놈처럼. 걔 일생일대의 목표거든 부모님께 인정받는 거.”
“인정받는 거?”
“너도 알지? 걔네 부모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운영하는 거? 그거 걔네 형 말고 반호 준다잖아. 그래서 걔 지금 죽어라 일 배우고 있어, 형한테 안 빼앗기려고.”
“그래서 바쁜 거였구나.”
“오히려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네?”
“네가 나랑 대화도 해주니 좋지. 너 반호한테만 온 신경이 가 있었잖아.”
정곡이 찔린 느낌이다. 그동안 반호와 나 사이에서 소외되었을 도형 선배에게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반호랑 이제 아무 사이 아니니까 괜찮은 거지? 내가 너랑 친하게 지내도?
“친하게 지내는 거야, 상관없죠.”
“그럼 앞으로 내가 전화하면, 받아?”
“선배 전화할 사람 많잖아요.”
“그래도 생일날 같이 있고 싶은 건 넌데?”
“또 거짓말.”
“진짜인데?”
“말에 진정성이 없잖아요. 그런 말이 어떻게 바로바로 나와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도형 선배도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같이 커피 마신 걸로 만족할게.”
손목시계를 보니 슬슬 강의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일어서려다 테이블 위에 놓인 도형 선배의 담뱃갑을 보고 다시 앉았다.
“선배, 담배 중에 파란색인 거 알아요? 진한 파랑은 아니고 연한 파란색······흰 바탕에.”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반호가 피우는 담배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이렇게 사이가 어그러졌는데 담배 뭐 피우냐고 물어볼 일도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말해서는 모르겠는데. 팔리아멘트 아쿠아 말하는 건가? 아님 윈드 블루?”
“됐어요, 그럼. 저 수업 들으러 가야 돼서 갈게요.”
나는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의자가 삑사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도형 선배도 따라 일어섰다.
“담배 피우고 싶으면 내가 알려줄게. 전화해.”
도형 선배가 상큼하게 말했다.
“꼭 악의 무리로 끌어들이는 거 같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담배 친구 생기면 나야 좋지.”
밖으로 나오니 역시나 빗방울이 떨어졌다. 우산 쓰고 같이 가자는 도형 선배를 만류하고 돌려보냈다. 도형 선배는 투명 우산을 쓰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도형 선배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나는 충동적으로 카페 옆 편의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