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벽화 동아리도 있고, 오후에 교양수업도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밖에 나왔다. 혹여 식당에서 반호와 마주칠까 봐 늘 먹던 아침도 걸렀지만, 배고픔도 느낄 수 없었다. 눈이 너무 부어서 나는 알이 없는 뿔테안경을 쓰고 동아리방 문을 열었다.
“어, 유화 왔어? 안경 썼네? 원래 눈이 나빴던가?”
“아뇨, 그냥.”
우혁 선배의 인사에 동아리 사람들의 시선이 다 내게로 향했다. 그중에 반호도 있었다. 멀리 서 있는 반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반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자기가 차놓고, 꼭 자기가 차인 것처럼.
“이번 도안은 이걸로 하자.”
우혁 선배와 내가 도안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준비물 리스트를 만들고 장소를 물색했다. 반호와 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반호와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해야 할 텐데 어떻게 이 껄끄러운 상태로 할지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심지어 오늘은 반호와 같이 듣는 교양수업도 있는 날이었다. 이렇게 차일 줄 알았으면, 고백을 하지 말걸. 하긴 뭐, 알았나? 이렇게 대차게 차일 줄을.
“오늘은 둘이 한마디도 안 하네? 둘이 싸웠어? 둘 다 오늘 얼굴도 까칠하고.”
우혁 선배가 나와 반호 선배의 사이가 냉랭한 게 느껴졌는지 물었다. 옆에 있던 율희가 눈치 좀 챙기라며 우혁 선배를 팔꿈치로 툭 쳤다. 우혁 선배가 악 소리를 냈다. 뒤에 있던 성찬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반호에게 담배 피우러 가자며 그를 데리고 나갔다.
“왜, 왜? 둘이 진짜 싸웠어?”
반호가 나가자 우혁 선배가 작은 목소리로 율희에게 물었다. 율희는 얼굴을 찡그리며 좀 조용히 있으라 했지만 우혁 선배의 궁금증을 막을 순 없었다.
“아니면 반호가 유화한테 고백했다 차였어?”
우혁 선배의 물음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걔 중 몇몇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동조하기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저 사람들도 반호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건가? 차인 건 난데, 소문이 거꾸로 나게 생겼다.
“아, 진짜 선배는!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우혁 선배는 썩어 들어가는 내 얼굴을 이제야 눈치챈 건지 입을 합 다물었다.
“미안하다, 유화야. 내가 궁금한 걸 못 참아서. 당사자들 일은 당사자들만 알겠지.”
우혁 선배의 말에 뒤에서 수군대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각자 할 일을 분주하게 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조용해진 동아리 방에 반호와 성찬이 같이 들어왔다.
*
일이 좀 정리되자 하나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나도 짐을 챙겼다. 율희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지만 도저히 입맛이 없어 힘없이 손사래를 치고 동아리방을 나갔다.
“유화야.”
뒤에서 반호가 굳은 얼굴로 불렀다. 아까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갔던 성찬과 함께였다.
“점심 먹어.”
“아니, 난 안 먹으려고. 둘이서 먹어.”
냉랭한 내 대답에 반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티를 안 내고 싶은데, 불편한 마음이 도무지 숨겨지질 않았다.
*
교양 수업 들어가기 전 시간이 좀 떠서 나는 학교와 거리가 좀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여기라면 반호와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학교 학생들보다는 옆 학교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으니. 나는 따듯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다.
[유화, 어디야?]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 진동이 울려 봤더니 도형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 학교 뒷문 쪽 카페요.]
[아, 혹시 거기인가?]
아는 곳인가? 하며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카페의 유리창이 통통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도형 선배가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문자를 보냈다.
[뭐해요? 들어와요.]
[그럴까?]
도형 선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입은 갈색 재킷이 카페와 잘 어울렸다. 카페에 앉아 있던 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이야.”
“어제 봤지 않나요?”
“예리한데?”
도형 선배는 맥없는 농담을 하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딱히 농담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입을 다물고 교양 도서만 보고 있었다. 도형 선배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바람 좀 쐴까?”
아침에 나섰을 때는 날씨가 좋았는데 어느새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도형 선배의 옆에 서 있었다. 도형 선배는 담배를 꺼내며 바람에 나부끼는 곱슬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이 씨발.”
옆으로 부는 바람에 라이터 불이 훅 꺼졌다 솟아올랐다. 도형 선배는 담뱃갑으로 바람을 막고 겨우 불을 붙인 뒤 손을 털었다. 나는 도형 선배의 담뱃갑을 유심히 보았다. 이건 반호가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반호 생각이 나는 게 진절머리 났다.
“나 오늘 생일인데.”
도형 선배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 진짜 생일이라니까? 왜 안 믿어?”
“저번에 뻥 친 전적이 있으니까 그렇죠.”
“오늘은 진짜 생일이야. 카톡에 뜰 텐데?”
카톡을 확인하니 정말 도형 선배의 생일이 맞았다.
“축하해줄 사람이 많을 텐데 왜 여기 있어요?”
“너 있잖아. 너한테 생일 축하받으려고.”
도형 선배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웃었다.
“축하해요.”
“참 무성의해. 한결같아 애가.”
“나한테 뭘 바라요? 선물도 줄까요?”
“됐다, 됐어. 반호한테 하는 거 반만큼이라도 나한테 좀 해줘 봐라.”
반호라는 말에 내 얼굴이 굳어졌다. 도형 선배도 말해놓고 아차 싶은지 툴툴거리는 걸 멈추고 멋쩍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빨았다. 도형 선배도 소식을 들은 걸까? 내가 차였다는 소식, 혹은 반호가 차였다는 소문.
곧 차가운 비가 떨어질 듯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나는 무심코 숨을 들이쉬다 목구멍으로 치민 담배 연기에 쿨럭거렸다.
“아이, 간접흡연. 바람 쐬자더니 담배나 냄새 맡게 하고.”
내가 핀잔을 주며 쿨럭거리자 도형 선배가 웃었다.
“바람 쐬는 게 담배 피우는 거야. 꼬우면 너도 피우든지?”
“조만간 피울지도 몰라요.”
나는 씁쓸하게 웃고 카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선배도 담뱃불을 지져 끄고 뒤따라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