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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4

by 청운0622 2025. 5. 30.

2: [헛된 희망]

 

 

학기 초라 들뜬 분위기가 캠퍼스 내에 가득 퍼져 있었다. 오늘은 벽화 동아리 재정비 겸 재료 정리하는 날이었다.

 

거기 물감 색깔별로 정리해 보자. 물감 굳은 거는 한쪽으로 몰아놔!”

 

동아리 방에 도착하니 우혁 선배가 후배들한테 분주하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신입생이 들어왔다더니 못 보던 여자애들도 있었다.

 

! 선배 여기 것들은 거의 다 굳었는데요?”

 

율희가 우혁 선배에게 씩씩하게 대답했다. 기숙사 방에서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어느샌가 율희는 벌써 와서 물감통을 정리하고 있었다.

 

, 쓰고 뚜껑 안 닫은 사람 누구야? , 그거 비싼 건데. 붓은, 붓은 어때?”

 

말라비틀어진 거 몇 개 있습니다! 형님.”

 

쭈그려 앉아 있던 반호가 넉살 좋게 대답했다.

 

아오, 안 되는데. 저번에 정리 좀 잘해둘걸. 이번에 할 거 많은데.”

 

우혁 선배가 머리를 감싸며 절망하다 동아리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반색하고 다가왔다.

 

유화야! 왔구나. 우리 동아리 구원자.”

 

우혁 선배가 반가움에 내 손이라도 잡을 모양새라 나는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구원자는 무슨, 다들 일찍 왔네요.”

구원자 맞지. 다 죽어가던 동아리 네 금손으로 다 살려놨는데. 작년에 동아리 성과가 좋아서 이번 연도는 지원금도 받았어.”

 

동아리 회장인 우혁 선배는 이번에 받은 지원금으로 학교 외 다른 곳의 벽화도 해보자며 이것저것 계획 세운 것들을 내게 신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배의 말에 호응하며 옆에서 그의 계획을 핸드폰으로 받아 적었다. 동아리 부회장을 따로 두지는 않았지만, 내가 나름 열혈 멤버다 보니 거의 부회장처럼 우혁 선배를 보좌하는 포지션이 됐다.

반호 선배는 나랑 우혁 선배가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가 왠지 굳은 얼굴로 지나쳐 물감 정리를 도왔다.

 

선배, 반호 선배 맞죠? 우혁 선배한테 들었어요.”

선배는 그림 잘 그리세요?”

 

우혁 선배는 잘생긴 반호를 미끼로 동아리에 신입생을 많이 꾀어 오곤 했는데, 지금 반호에게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말을 걸고 있는 저 풋풋한 여학생들이 그 희생양인 모양이었다.

 

그림은 잘 못 그리고, 옆에서 돕는 건 잘하지. 너네는 그림 잘 그려?”

 

반호는 여자애들이 큰 물감 통 드는 걸 도우며 친절하게 말을 이어갔다.

 

, , 아무한테나 친절하지. 얼굴이나 잘생기질 말든지.

나는 반호가 여자애들에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며 배알이 꼴렸다. 저렇게 늘 친절한 모습이라 나는 아무리 반호가 내게 잘해줘도 도대체 나에 대한 호감인지, 단순한 호의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옆에서 우혁 선배가 얘기하고 있었지만, 자꾸 저쪽에서 반호가 여자애들과 이야기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유화야, 그래서 2학기에는······유화야? 내 말 듣고 있어?”

······! 듣고 있죠. 2학기에 뭐 한다고요?”

 

우혁 선배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어 나는 다시 활짝 웃으며 핸드폰 캘린더를 켰다. 그 와중에도 반호 쪽 소리가 계속 들렸다.

 

그림 못 그리면 안 되는데?”

저 그림 잘 그려요!”

그림은 저기 저 선배가 잘 그려. 보이지? 저 예쁜 선배. 쟤는 미대 아니고 영어영문학과인데도 그림 잘 그려. 우리 동아리 에이스야.”

 

반호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반호의 손을 따라 여자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누구야? 반호 선배가 말하는 예쁜 선배가?’하는듯한 언짢음이 담긴 시선이었다. 남의 마음에 불 질러 놓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반호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갑자기 왜 칭찬해 주고 그래? 당황스럽게.”

사실이잖아, . 우리 동아리 에이스. 차기 회장으로 내가 점 찍어두고 있어.”

 

우혁 선배가 자랑스럽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차기 회장은 무슨! 나 안 한다고 했어요!”

? 해줘~나 이번 학기에 졸업하는데, 내가 졸업하면 누가 해?”

 

우혁 선배와 내 단골 주제인, 회장 자리를 물려받냐 안 받냐에 대한 실랑이가 또 펼쳐지자 다들 웃으며 넘어갔지만, 내 얼굴의 열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동아리 방을 정리하면서 슬쩍 반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한 번도 나를 보지 않고 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사람 속 흔들어 놓고, 자기 혼자만 멀쩡했다.

 

우혁 선배의 장대한 계획을 정리한 후 나는 뒤에 있는 영문학과 스터디 때문에 먼저 가야 해서 동아리 사람들에게 간다는 인사를 했다. 나가려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반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기쁜 마음에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는데 그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뭐야? 자기가 먼저 봐 놓고. 무안해져 나는 손을 재빨리 내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늘 저런 식이었다. 언제는 세상 다정하게 나를 쳐다볼 때가 있는가 하면, 언제는 매정하게 눈길을 확 거두어버리곤 했다. 정말이지, 헷갈리게 했다.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좀 전엔 예쁘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인사를 씹고.

 

스터디를 하면서도 반호가 고개를 휙 돌리던 그 순간이 자꾸 생각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스터디원이 영어로 말하는 걸 들으면서 반호가 줬던 빨간색 펜을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뭔가 반호와 한 번 각 잡고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 애매한 관계 때문에 너무 지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