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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8

by 청운0622 2025. 6. 8.

미안해. 내가 전 여친을 잘못 둔 탓이야.”

도대체 뭐 어떻게 헤어졌길래 그 여자가 선배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난리예요.”

걔가 집착이 심해서 그래. 나는 잠깐 만날 생각으로 사귄 건데 장은수는 나랑 무슨 백년가약 맺은 것처럼 구니까.”

 

도형 선배가 볼을 긁었다. 이럴 때 보면 키만 컸지 철없는 소년의 모습이다.

 

무슨, 사귈 때부터 잠깐 만날 생각으로 사귀어요?”

나는 가능한 많은 여자를 만나자는 주의라. 남들이 하는 깊고 진지한 연애는 나랑 안 어울려.”

 

도형 선배가 씩 웃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참나.”

용서해 주는 거야?”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 말아요.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나는 기숙사 근처에 있는 흡연 부스로 걸어갔다. 도형 선배도 나를 따라왔다. 도형 선배는 다른 학교 학생이면서 마치 이 학교 학생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캠퍼스를 걸어 다녔다. 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도형 선배가 비싸 보이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 뒤 웃었다. 부탁한 적도 없는데, 도형 선배는 자꾸 불을 붙여준다. 그리곤 자기도 붙여달라는 듯 입에 담배를 문 채로 턱짓하길래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왜 나는 안 해줘?”

 

도형 선배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웅얼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연기를 내뱉었다.

 

분이 안 풀려서요.”

 

도형 선배는 아무튼 쉽지 않은 여자라면서 툴툴거리며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 어제 반호랑은 뭐했어?”

밖에서 술 좀 마시다가 기숙사 들어갔어요.”

그래?”

되묻는 도형 선배의 눈이 커졌다. 나는 괜히 찔려서 조용히 담배만 피웠다.

 

반호가 뭐래? 나랑 놀지 말래?”

, 놀지 말라 던데요. 위험한 사람이라고.”

난 위험한 사람 아냐. 그냥 인생을 즐기는 사람이지.”

 

한량. 도형 선배의 당당한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늘 여유롭고 가벼운 태도에, 대학생이면서도 가지고 다니는 온갖 비싸 보이는 소지품. 잘난 외모. 내게는 없는 것들을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도형 선배가 신기했다. 그래서 도형 선배와 있을 때는 나까지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반호 때문에 속앓이하다 음침해져 있던 마음도 가끔은 별거 아니라고 느껴질 만큼.

 

나는 너랑 노는 거 재밌는데.”

나도 재밌어요. 다른 세상 사람 같아서.”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도형 선배가 나를 쳐다보다가 연기를 다른 쪽을 향해 뱉었다. 반호와는 같이 담배를 펴도 반호가 나를 쳐다보지 않아 얼굴 한번 마주 보는 일이 없는데, 도형 선배는 담배 피울 때도 얼굴을 마주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도 클럽 가자고 하면······ 안 가겠지?”

덕분에 무서워서 한동안 못 가겠네요.”

그럼 다음에 밥 한 번 살게. 거절은 안돼.”

알겠어요.”

 

도형 선배가 담배를 바닥에 휙 던졌다. 담뱃불이 힘없이 바닥과 맞닿자마자 꺼졌다.

 

, 이제야 한시름 놨네. 난 이제 수업 들으러 갈게.”

웬일이에요?”

웬일이라니! 나도 학생인데. 그리고 그동안 수업 너무 많이 빠져서 이번에도 빠지면 경고야.”

 

도형 선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캠퍼스를 벗어나는 걸 나는 지켜봤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나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저 사람의 삶은 가볍겠지, 나는 너무 무거운데. 나는 오늘도 과외 알바를 가야 한다. 자동차, 좋은 집, 괜찮은 옷들, 고급 라이터. 도형 선배가 이미 갖추고 있는 걸 나는 언제 돈 벌어서 얻을 수 있을지. 암담한 현실을 떠올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선은 현재에 닥친 일부터 하나씩 처리하자. 과외, 전공 과제, 엠티를 가장한 벽화 프로젝트. 그리고 반호.

 

, 그런데 반호는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닌 것 같다.

 

*

 

엠티 준비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됐다. 나와 도형 선배는 도안 완성에 열을 올렸고, 다른 부원들은 물품 준비를, 무엇보다 엠티 레크리에이션이며 뭘 어떻게 잘 먹을지 준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대망의 엠티 날, 몇몇은 오전부터 학교 근처 세일마트로 장 보러 갔고, 나머지는 각자 수업에 들어갔다. 우혁 선배는 이런 날 왜 전공 수업을 들어야 하냐며 울상을 하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나도 내 강의실에 들어가 교수님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가방에서 진동이 계속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