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갈래? 선물 사러?”
“아, 어, 어머니 생신 선물?”
나한테 말을 걸 거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들려온 반호의 목소리에 놀라 나는 허둥거렸다. 뒤에 훅 다가온 반호한테선 깨끗한 냄새가 났다. 나처럼 술 냄새를 지우려 아침에 열심히 씻고 나왔을까.
“생신 선물? 선배 어머니 생신이세요?”
반호와 나 사이에 느닷없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진서였다. 동아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여자애. 반호와 같은 경영학과. 그리고 동아리 활동 하면서 유독 반호를 자주 쳐다보던.
“응.”
반호가 심플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면 안 돼요? 저 선물 잘 고르는데, 제가 선물 고르는 센스가 있거든요.”
유진서가 반호를 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 산뜻한 얼굴을 보며 나는 속이 썩어 들어갔다. 선물 고르는 센스는 있는데, 낄 데 안 낄 데 가리는 센스는 없는 가 보다. 아니면, 없는척 하고 싶은 건가. 나는 눈썹을 찌푸리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물 고르는데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지.”
“왜요? 어디로 가세요? 저도 살 거 있는데 같이 가요.”
하지만 유진서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가 싫은 티를 내도 꼭 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유진서가 오로지 반호 때문에 이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아, 가는 김에 물감도 같이 사면 되겠다. 저희 빨간 물감 다 떨어졌던데.”
급기야, 유진서는 손뼉까지 앙증맞게 짝 치며 자신이 가야 할 이유를 늘렸다. 나는 난처해졌다. 반호가 설마 얘도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빨간 물감은 내가 사러 가면 돼. 그런 귀찮은 일을 우리 부원들에게 시킬 순 없지.”
엠티 일정을 동아리 회원들에게 열정적으로 브리핑하던 도형 선배가 당장 ‘야레야레’를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포스를 풍기며 유진서에게 말했다. 다행이었다.
“그럼 회장님도 같이 가실래요? 같이 가면 좋잖아요!”
“에? 내가 왜 가. 나 혼자 사러 간다니까?”
약간의 병맛과 함께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우혁 선배도 유진서의 갑작스러운 파티원 초청에 당황했는지 눈이 커졌다. 애초에 반호가 어머니 생신 선물 사러 가는데 왜 네가 파티원을 늘리는 거냐. 유진서의 나무 열 번 찍을 기세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미안한데, 나는 유화한테 선물 사러 가자고 부탁한 거라.”
내가 몇 번의 얼탱이를 맞을 동안 말이 없던 반호가 유진서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선배들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데.”
유진서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친해지는 건, 동아리 활동하면서 친해지는 거고.”
반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유진서가 더 말하려고 하자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평소 같으면 여자애들한테 친하든 안 친하든 잘 대해주는 사람이, 별일이었다.
유진서는 민망한지 얼굴을 붉히며 바로 자기 친구에게 가 옆에 찰싹 붙었다.
“아니, 반호 선배랑 유화 선배 안 사귀는 거 아니었어? 왜 저래.”
거리는 좀 있었지만,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머리에 핏줄이 서는 기분이었지만, 꾹 참았다.
반호야, 인기 많은 사람이니까 언제든 가능성이 보이면 잘해보려는 여자들이 있겠지. 게다가 나랑 반호가 연애할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 지금이라면, 더더욱.
반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어필하는 걸 내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여친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그걸 다 쳐내겠나. 앞으로 이런 상황이 많이 생길 거 같은데, 그걸 어떻게 버틸지 생각하니 막막했다.
“유진서 뭐야, 반호 선배 좋아하나?”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와 있는데 율희가 내 옆으로 왔다. 팔짱을 끼고 발을 까딱이고 있는 게 아주 심기가 안 좋아 보였다. 그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몰라.”
“그나저나, 언니 뭐예요? 반호 선배랑 또 어디 가요? 어제 만난 사람이 반호 선배에요?”
율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유심히 봤다. 역시 율희는 뭐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진행 중인가 봐요? 역시 남녀 사이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참 복잡해.”
“아니야, 그냥 이번 한 번만. 부탁하길래.”
“그걸 왜 언니한테 부탁해요? 언니한테 상처도 준 사람이?”
“모르지. 나도 알고 싶다 왜 그러는지 ”
나는 하늘을 보며 숨을 내뱉었다.
“반호 선배도 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 것 같아요. 숨기는 게 많은 거 같달까. 분명 같이 본 시간이 있는데도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본 남자 중에 제일 어려워.”
“너도 그렇게 생각해?”
율희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 써서 볼 터치를 하고 온 율희의 얼굴이 아주 상큼했다.
“언니도 그래요? 언니는 그래도 반호 선배랑 친했잖아요.”
“나도 모르겠어, 그 오빠는. 자기 얘기도 잘 안 하고. 형이고, 어머니고, 그런 가족 얘기도 인제야 들었는걸.”
“그런 얘기도 해요? 그 선배가? 확실히 언니한테는 좀 열려 있나 보다. 가족 얘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던데.”
율희가 눈을 빛냈다.
“반호 선배랑 다시 잘 될 가능성은 없어요?”
“거의 제로라고 봐야지.”
나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한 번 차인 마당에 또 어떻게 잘되겠는가. 이미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는데, 고백을 또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반호가 먼저 나를 좋아해 줄 리도 없고.
“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언니, 아직 반호 선배한테 마음 있죠?”
“······.”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있네.”
“아무튼 귀신같이 그런걸······.”
“가능성을 열어놔 봐요. 반호 선배도 언니가 싫지는 않으니까, 약속도 잡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진짜 싫었으면 같이 안 있으려고 그랬겠지. 뭐하러 둘이 만날 일을 만들겠어요?
“뭘 열어놔, 가능성 제로에 수렴하고 있는데.”
나는 신발코로 애꿎은 땅바닥을 툭툭 찼다.
“아님, 내가 뭐, 어떻게 힘 좀 써봐? 오작교 한 번 해봐요?”
율희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했다. 율희는 언제나 씩씩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