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똥차? 벤츠?]
한숨 푹 자고 난 뒤에 일어났다. 숙취가 올라와 속이 매슥거리고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으······ 죽겠네.”
침대에 계속 누워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우혁 선배가 전부터 강조한 동아리 모임 필참 날이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율희는 방금 씻었는지 화장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왔다.
“언니, 완전 죽은 듯이 자던데요? 언니 코에 손대볼 뻔했잖아요.”
“죽을 뻔했어. 아니 지금 죽을 것 같아.”
“어제 어디 가서 그렇게 술을 마시고 온 거에요? 평소엔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그냥, 누구랑 좀 마셨어.”
율희가 머리에 수건을 감으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흐응, 누구랑 마셨을까?”
나는 얼굴을 들이밀며 놀리려는 율희를 막았다.
“궁금해하지 마. 얼른 머리나 말려.”
“아무튼 잘생긴 사람이랑 마셨겠지. 반호 선배나 그 친구라는 다른 학교 오빠나, 다 잘생겼으니까. 부럽다~ 부러워.”
“너는 뭐, 남친도 있는 애가.”
나는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며 대답했다.
“언니! 남친 있다고 눈 없어요? 나도 잘생긴 남자 보면 좋아요. 아, 반호 선배는 별로 안 좋고요. 언니 맘고생 시켰으니까.”
나는 서랍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술 냄새를 지우기 위해서라도 빡빡 씻을 생각이었다. 혈중알코올농도가 장난이 아닐 것 같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하긴 어제 클럽 가기 전에도 마시고 기숙사 들어오기 전에도 마셨으니, 도대체 몇 시간을 술을 마신 거야?
“그래서 누군데요? 어제 같이 술 마신 사람?”
“안 알려줄래. 소문낼 것 같아.”
“왜요? 알려줘요! 소문 안 낼 테니까. 언니의 은밀한 사생활은 나만 알고 있어야······ 악!”
내가 율희의 볼을 살짝 꼬집자, 율희가 과장되게 아파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파요! 아파! 이 언니 사람 폭행하네! 하나밖에 없는 룸메 동생한테.”
“까불지 말고. 동아리 갈 준비나 해. 나도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언젠가 꼭 알아낼 거예요.”
율희가 볼을 감싸며 불퉁하게 있다가 히 웃었다. 나는 화장실 문을 열면서 말했다.
“너, 나 나오기 전에 화장 안 끝났으면 나 먼저 준비해서 갈 거야.”
내 말에 율희의 눈썹이 시옷 모양으로 내려갔다.
“언니, 나 화장 기본 1시간 걸리는데······ 너무해.”
“난 화장 10분 컷이야. 너도 좀 본받아. 뭐 그렇게 오래 걸려?”
“언니는 본판이 괜찮으니까 그렇죠. 나는 얼굴을 재창조해야 하는데. 그렇게 치면 1시간도 짧은 거라고요.”
율희가 툴툴거렸다. 나는 웃으며 씻으러 들어갔다.
오늘은 율희와 같이 동아리방에 갈 생각이었다. 필참이라고 하니, 외부에서 벽화 작업을 할 곳이 정해졌나 보다. 술에 취한 채로 반호와 헤어졌다가 맨정신으로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좀 민망할 것 같았다. 나는 잡생각을 지우고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속에 집어넣었다. 우선, 빨리 씻고 나가자. 우혁 선배 삐지기 전에.
*
“유화야. 너의 책임이 막중하다.”
“에······?”
동아리방에 들어가자마자 우혁 선배가 대뜸 비장한 얼굴로 내 어깨를 짚었다. 들어보니 어떤 동네의 마을회관 벽을 우리 동아리가 맡아서 그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 건 잡아왔지. 사실 내가 잡은 건 아니고 우리 학과 교수님이 지인찬스로 얻어낸 거지만. 사례비도 받고, 나중에 이걸로 지원금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니냐.”
우혁 선배가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우리 동아리 엠티는 그 동네에서 한다! 숙박 장소도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 회비는 술이랑 음식값만 걷으면 돼!”
우혁 선배의 발언에 동아리 회원들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명색이 동아리 첫 엠티인데 일이랑 엠티를 세트로 묶어버리다니.
“우혁 선배, 그렇게 돈이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유화야. 우리 같은 돈 없는 대학생들이 돈 아끼면 땡큐인거지. 동아리 활동도 하고 겸사겸사 엠티도 가고. 다 우리 동아리 회원들을 위해서 내가······.”
우혁 선배가 신나게 말하다가 동아리 방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는 반호를 보고는 헛기침했다.
“큼, 물론, 여유 있는 친구들도 있겠지만, 이왕 하는 거 돈 걱정 없이 동아리 활동하면 좋잖아?”
“그럼 엠티 기간 동안 다 끝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 빡센데?”
옆에 있던 율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금 토 일, 이렇게 사흘 갈 거야. 삼일이면 가능하지. 인원도 많이 늘었고. 금손 유화도 있으니까.”
“삼일? 선배 저번에 우리 학교 벽화 하는 데만 해도 한참 걸렸잖아요!”
“큼, 큼. 삼일 안에 꼭 안 끝내도 되는데 거리가 있으니까 간 김에 한 방에 끝내자고. 할 수 있잖아? 응? 율희야?”
“흥, 그럼 엠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벽화 뼈 빠지게 그리다가 놀지도 못하겠네.”
율희가 팔짱을 낀 채로 새초롬하게 말했다. 우혁 선배는 건수 잡은 것에 취해있는지 불평하는 율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량 넓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설마 내가 24시간 돌릴까? 해 떴을 때 열심히 하고, 해 지면 당연히 술 파티지. 걱정도 많다~ 율희야.”
우혁 선배가 동조를 구하듯 동아리 방을 둘러봤지만 다들 썩 내켜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엠티를 벽화 작업으로 퉁치는 게 영 찝찝한 모양이었다.
“에이, 왜 이래, 다들. 길게 보면 돈 절약이야. 작년 만해도 물감값 때문에 회비 꽤 걷어야 했잖아.”
그러고 보니 작년에 물감값 때문에 나갔던 비용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너무 좋아하는 동아리라 기꺼이 회비를 냈지만, 안 그래도 생활비 모자란 데 동아리 비용까지 나가니 빠듯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한 번만 잘 끝내면 앞으로 물감 값, 운영비 싹 다 지원받을 수 있게 해준다고 교수님이 약속하셨어. 한 번만! 응? 엠티 2학기 때 또 가면 되지~ 그땐 딱 노는 걸로만!”
“좋아요. 선배 말대로라면.”
내 동조에 힘을 얻은 선배가 감격스럽다는 눈빛으로 내게 한 번 쏘고는 서둘러 도안을 꺼내 펼쳤다. 사람들 캐릭터가 있는 밝은 분위기의 도안이었다.
“스케치는 나랑 유화가 맡고 다른 인원은 스케치 되는대로 채색하자.”
신난 우혁 선배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검은색 마카로 일정을 적었다. 반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파란색 마카를 들어 칸을 채웠다.
“장도 봐야죠. 금요일 저 공강이니까 시간 되는 인원 모아서 먼저 장보고 이동할게요.”
“오 반호, 그래 너 조리학과 복전도 했었지.”
그러고 보니 반호가 전공은 경영학과, 복수전공으로 조리학과를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요리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건 아직 몇 가지 없지만, 해볼게요.”
“그래 인마. 나는 라면밖에 못 끓여. 네 덕분에 애들 굶기지는 않겠다.”
우리 동아리에 재능캐가 많다며 동아리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지는 우혁 선배를 뒤로한 채로, 도안에 그림을 더 그려 넣고 있던 나에게 반호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