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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24

by 청운0622 2025. 6. 3.

걱정돼서.”

 

의외로 답이 빨리 나왔다.

 

네가 걱정된다고 나는. 보호자처럼 군다고 너는 싫어하지만 나는 계속......”

 

반호가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네가 걱정돼.”

내가 왜 걱정되는데?”

 

나는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반호에게 자꾸 무언가 캐내고 싶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혹시 나에 대한 애정이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져서. 묻다보면 뭐라도 나올까 싶어서.

 

“······모르겠어.”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맨손으로 긁어 무언가 파내려는 것처럼 얻는 것은 없고, 손가락만 아팠다. 정말 이건 희망 고문이 아닐까, 여전히 내게 다정하고 나를 걱정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반호의 숙인 얼굴을 보며 나는 술을 삼켰다. 그래, 그냥 술이나 먹자. 속에서 쓴맛이 나서 그런지 속에 들이키는 쓴 술은 오히려 달았다.

 

발은 괜찮아?”

 

반호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내 신발이 눈에 들어왔는지 물었다.

 

신발에 구멍만 났어. 괜찮아. 머리카락은 좀 뽑혔지만.”

 

반호가 손을 뻗어 부스스해진 내 머리칼을 귀에 꽂아 정리해 줬다. 저 나쁜 손을 물어버릴 수도 없고 정말 어떡하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는 반호의 큰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게 내버려두었다.

 

강아지 같다, . 시골 강아지.”

“······꼬질꼬질하다는 뜻이야?”

꼬질꼬질하고, 억울한 표정에, 순하고, 그런데 반갑다고 꼬리는 막 흔들고.”

세상에.”

칭찬인데, 시골 강아지. 귀엽잖아.”

 

반호가 따뜻한 눈으로 계속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날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귀엽다고?”

아니, 아니. 꼬질꼬질하다고. 게다가 억울해한다고?”

, 너 기죽을 때 억울한 표정 짓잖아.”

그럼 내 기 좀 죽이지 마.”

 

나는 입을 삐죽였다.

 

내가 네 기를 죽여?”

오빠, 한 번씩 되게 무서울 때 있어. 눈이.”

그런가?”

 

반호가 뒷머리를 긁었다.

 

미안해.”

아니, 뭘 또 사과까지?”

무섭게 굴어서 미안해. 너한테는 안 그러고 싶은데. 요즘 할 게 많아서 그런가 예민해져서.”

 

반호가 마디가 굵은 두 손으로 손깍지를 꼈다.

 

오빠, 아버지 사업 물려받는다면서? 그것 때문에 바쁜 거지?”

어떻게 알아? , 박도형 이 자식이······.”

? 알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꼭 그렇다기보단.”

 

반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확실한 게 아니라서 그래. 내가 물려받을지 우리 형이 물려받을지.”

오빠는 물려받고 싶어?”

 

반호는 내 질문이 의외인지 놀라는 눈치였다. 잠시 생각하더니 반호는 말했다.

 

물려받고 싶다기 보단, 우리 형이 물려받으면 사업 망할 것 같아서.”

?”

형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야. 자기만 생각하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반호가 말하다가 멈칫했다. 나는 침울해 보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반호는 가족 얘기를 하는 걸 많이 꺼리는 것 같았다.

 

이제 일어나자. 기숙사 문 열었을 거야.”

 

반호는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가리켰다. 새까만 색에서 푸른색으로 하늘색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 그래.”

 

반호가 불쑥 일어서서 나도 흙을 털고 일어섰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괜히 사업 얘기를 꺼낸 건가 싶기도 했다. 반호는 걸으면서 남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내 술병은 이미 비어있었다.

 

오빠랑 술 한번 마셔보고 싶었는데, 오늘 마셔보네.”

 

나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 일부러 쾌활하게 말했다.

 

장소가 별로지만. 다음에는 술집 가자.”

 

반호가 나를 뒤돌아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조금씩 밝아지는 하늘 아래 새벽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약간 화가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안 갈래. 자꾸 어디 가자고 하지 마. 그래도 선물 사러는 같이 갈게.”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기려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반호는 잠시 꿍한 표정을 짓다 같이 웃어 보였다.

 

그래, 선물 사러 가자.”

 

기숙사 앞에 도착해 카드를 찍자, 문이 열렸다. 나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밤을 꼴딱 새워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로비의 하얀 조명 아래 반호의 눈 밑이 까맣게 그늘진 게 보였다.

 

오빠, 다크서클 생겼다.”

 

내가 반호의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는 안 그런 줄 알아?”

둘 다 밤 샌 거 티 나네.”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지, . 오빠가 자발적으로 온 거지만.”

 

반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올라탔다.

 

빨리 들어가자. 자야지. 오후에 동아리 가야 하잖아.”

, 맞다.”

우혁이 형이 들으면 섭섭해하겠네. 유화가 동아리 모임 까먹었다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다 보니 반호의 기숙사가 있는 층에 도착했다.

 

나중에 봐.”

 

반호가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잘 자.”

 

나는 졸린 눈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반호도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게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반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좋아해,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