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붉음에서 어스름으로 변해갈 무렵, 반호가 기숙사에 돌아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반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음과 동시에 그가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식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당황해 밥알을 제대로 씹지도 못했다. 옆에서 종알거리던 율희에게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반호가 일주일은 더 있어야 올 줄 알았다. 아버지 일을 도와준다고 학기가 시작하고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오곤 했으니.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른 때보다 빨리 왔다. 나는 식당에 앉은 반호를 쳐다봤지만, 그는 나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서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기숙사 뒤편의 숲으로 갔다. 숲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호가 숲 안으로 걸어왔다. 내가 있든 없든 반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왔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검은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길어진 뒷머리로. 나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이라도 하듯이 못생긴 외투를 걸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반호는 푸름이 짙어지고 있는 숲속 길 끝에서 긴 다리로 걸어왔다. 나는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반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제 왔어?”
“두 시간 전에?”
반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큰손으로 그의 얼굴에 달라붙으려는 날파리를 쫓으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반호와 나는 벽화 동아리 내에서 꽤 친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반호는 내게 연락하는 일이 드물었다. 늘 내가 연락했고, 그마저도 씹거나 한참 뒤에나 대답하는 게 대다수. 오늘도 반호가 내게 온다는 연락을 하지 않고 불쑥 나타난 게 우리가 이 정도의 사이밖에 되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운해서 반호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버지 일은 다 끝났어?”
“그냥, 뭐.”
반호의 무심한 말에 나는 힘이 절로 빠졌다. 반호는 살짝 웃고는 숲길을 지나 기숙사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내가 있어서 담배 피우는 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걸까? 나는 길을 비켜주었다. 반호가 내 옆을 지나치려는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는 그의 무심하지만 진득한 눈빛이 ‘내가 그리웠어?’라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호는 눈길을 거두고 걸어갔다. 나는 반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더 말을 걸고 싶은 걸 애써 꾹 참았다.
‘그리웠어.’
*
기숙사에 돌아오자 어쩐지 율희가 눈을 빛내며 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왠지 왜 율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는 주저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언니, 왜 이제 왔어요. 기다렸잖아요.”
율희가 옆에 앉으라며 자기 옆자리를 팡팡 쳤다. 율희가 물어보려는 거야 뻔하다. 율희는 반호와 내 관계를 오해하고 있다.
“내 생각엔 역시 반호 선배가 언니 좋아하는 거 같아요.”
“또 그 얘기야?”
“작년에 동아리 활동할 때도 그 선배, 언니한테만 유독 잘해줬잖아요. 계속 언니 쳐다보고. 무거운 물감도 언니가 필요하다니까 다 척척 가져다주고. 저번에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 선배가 언니 뚫어져라 쳐다봐서 나랑 애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아니다. 반호는 나에게 잘해주는 척만 할 뿐이다. 그는 모든 여자에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친절한 거야 좋지만, 하필이면 외형이 남들보다 잘난 것이 문제였다. 유달리 큰 키에, 햇볕을 받아도 절대 타지 않을 것 같은 희고 말간 얼굴, 친구들과 크게 웃고 있어도 왠지 눈 밑의 그림자가 진, 조금은 예민해 보이는, 또 어떻게 보면 한없이 유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하는 사람.
어떤 자리든 반호가 있으면 여자들이 그 잘난 얼굴을 힐끔 몰래 쳐다보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지만. 내가 반호와 좀 더 친하다는 이유로, 반호는 내게 좀 더 잘해주는 것뿐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반호가 잘 대해줄 때마다 자꾸 마음이 흔들리는 내가 문제였다.
“아니야.”
“언니는 정말 그 선배한테 마음 없어요?”
율희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마음······?”
율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마음이야, 너무 많아서 탈이지. 하지만 괜한 말을 했다가 소문이 돌게 뻔했다. 가뜩이나 나랑 율희는 반호와 같은 동아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고 있자 율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언니, 잘해봐요. 한 번뿐인 대학 생활, 연애도 안 하고 보낼 순 없잖아요.”
“지는 커플이라고······.”
“언니! 학과 공부에, 벽화 동아리에, 알바에! 이 정도면 일중독이에요. 너무 열심히 살아.”
“뭐라도 해야 뭐라도 되지.”
“스터디도 동아리도 반호 선배랑 하는데, 겸사겸사 연애도 하면 되죠.”
“너는 그게 뭐 쉬운 줄 아니. 우리 기숙사 인기남인데.”
“언니가 꿀릴 게 뭐가 있어요! 나는 우리 언니가 더 아까워.”
율희의 주접에 나는 웃고 말았다. 혹시 그도 내게 마음이 조금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율희가 한 말 때문일까, 반호와 내가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자꾸만 그런 희망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나중에 율희가 코를 골며 잠들 때도 나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는 천장을 보며 반호가 추천해 줬던 노래들을 들었다.
*
햇볕이 가득 내리쳐 기숙사 창문을 통과했다. 기분 전환 겸 카페에서 공부하려고 나는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저만치 큰 가방을 메고 반호가 걸어가는 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뒤에서 반호를 계속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아 나는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오빠!!”
반호가 놀라서 돌아보았다. 햇빛을 받은 그의 얼굴이 아주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