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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15

by 청운0622 2025. 5. 31.

나는 팔짱을 끼고 반호가 보고 있는 그림을 같이 쳐다봤다. 그동안 반호를 피해 다녔던 게 찔려서 어쩐지 떳떳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 아니지, 보긴 봤는데, 대화를 오랜만에 하는 것 같아.”

 

반호가 말을 정정했다.

 

“······그러게.”

잘 있었어?”

 

반호가 나를 돌아보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 잘 있었지. 늘 지내던 대로.”

옷은 왜 벗었어?”

? , 그냥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반호가 손을 뻗어 내 팔에 손을 댔다.

 

소름 돋았는데?”

아냐, 아냐.”

 

나는 몸을 뒤로 물렀다. 반호도 아차 싶었는지 민망하게 손을 뗐다.

 

너 추워 보여. 옷 입어.”

안 입어도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반호와 옷 겹치기 싫어서 추운 거 감수하고 셔츠 벗은 건데, 지금 와서 입기도 좀 그랬다.

 

어서 입어. 감기 걸려. 여기 에어컨 틀어둔 것 같은데, 너 감기 한 번 걸리면 오래 아프잖아.”

 

반호가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그래도 내가 망설이자, 반호가 말했다.

 

옷 겹치는 거, 나는 괜찮아.”

 

그 말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알고 있었구나, 왜 안 입으려고 하는지. 반호가 내게 옷을 입히려는 의지가 상당해 보여 나는 하는 수 없이 팔에 걸쳤던 하늘색 셔츠를 다시 입었다. 하여튼 반호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많이 부린다. 자기 뜻대로 안되면 금세 표정이 바뀌고.

 

입었어, 됐지?”

 

반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그림을 보러 갔다. 전시관이 미로처럼 여러 통로가 이어졌다. 리포트를 써야 하니까 사진도 찍고, 메모도 했지만, 옆에 있는 반호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전시관에 커플이 많았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다 작품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니 코끝이 시큰했다. 만약, 그때 고백을 반호가 받아줬다면 나도 지금쯤 저들처럼 다정하게 반호와 전시를 보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

 

반호가 앞서 걸으며 그림을 보다가 우뚝 멈춰 섰다. 어머니가 남자 아기를 꼭 안고 있는 그림이었다. 딱히 특별한 건 없는 그림이었는데 반호는 한참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 입을 열었다.

 

우리 어머니가 화가신데.”

그래?”

 

반호와 안 지 꽤 되었는데 어머니 얘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어릴 때는 나랑 사이가 좋았어.”

“······지금은 안 좋아?”

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너무 바빠서 그런지 집에 신경을 안 썼어. 그래서 어머니 혼자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지······.”

 

반호가 나를 쳐다봤다. 까만 두 눈동자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어머니가 이젠 아무에게도 신경 쓰지 않아. 그냥 혼자 방에서 그림만 그리셔. 내가 오랜만에 집에 가도 본체만체해. 인사도 잘 안 받아주시고.”

인사도 안 받아주신다고?”

애정이 다 식어버린 것 같아. 우리 식구한테.”

 

반호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벽화 동아리 하는 것도 있어. 내가 그림을 너무 모르니까. 어머니랑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아서.”

 

어쩐지 그림 그리는 걸 즐기지도 않으면서 벽화 동아리를 계속하는 게 줄곧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나는 반호가 단순히 우혁 선배에 대한 의리로 동아리에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랑 대화하고 싶어서가 이유라니, 의외였다.

 

저걸 보고 있으니까, 생각이 나네. 원래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

 

그의 가정사야 잘 모르겠지만, 약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반호가 지나간 다음에 나는 그 그림을 찍었다. 리포트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길게 이어진 작품들을 거의 다 봐갈 즈음 반호가 내 어깨를 톡 쳤다.

 

전시 다 보고 점심 먹을래?”

나랑?”

 

당황해서 삑사리가 났다. 분명, 나 오늘 기숙사에서 나올 때만 해도 점심 누가 먹자 해도 안 먹고 빠져나오기로 다짐했었던 것 같은데.

 

그럼, 너랑 가지 누구랑 가. ? 약속 있어?”

······.”

 

뭔가 핑계라도 대고 빠져나가고 싶은데, 머리가 하얘져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박도형 봐?”

 

도형 선배의 이름을 꺼내는 반호의 눈빛이 예민해졌다.

 

아니?”

 

아니라고 하자마자 반호의 얼굴이 확 풀렸다. 참 이상하단 말이지, 금세 무서워지고, 금세 순한 인상이 되어버리고.

 

그럼, 점심 먹으러 가자. 아침 안 먹고 나왔더니 배고프네.”

 

얼결에 말려든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러자고 했다. 이거야 뭔, 데이트코스도 아니고. 가짜 커플 행세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앞서 걸어가는 반호의 태평한 얼굴이 얄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