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럴 수는 없다고]
“그게 될 거 같아?”
“유화야, 우리 잘 지냈잖아.”
그의 태연한 말에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안 될 것 같아.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거.”
“내가 널 이성으로는 안 좋아한다 해도, 우리의 관계는 좋아했어.”
“그게 더 비참해.”
반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어떻게 해줘?”
“최대한 얘기할 일 없으면 좋겠어.”
그 말을 하는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호는 내가 자기를 죄인이라도 되는 양 취급해서 억울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느낀 배신감이 너무나 컸다. 그리고, 너무 좋아했다. 그게 다 부정당한 시점에서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특히 이렇게 반호를 마주보고 있을 때는 더더욱.
“울지마, 유화야.”
반호가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이런 것도, 안했으면 좋겠어. 이런 것들 때문에 오해했으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내린 반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마. 나를 위한다면.”
나는 뒤돌아 혼자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반호는 그 자리에 한참을 우뚝 서 있었다.
*
한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반호를 피해 다녔다. 같은 기숙사, 같은 동아리, 같은 교양 수업까지 겹치는 게 너무 많았지만 반호와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다 멀리서 반호의 시선이 따갑게 꽂혀도 모른척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반호와 자주 가던 카페를 안 가는 것뿐.
그 카페를 지나다 보면 반호가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지나쳤다. 무의식적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반호와 나의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이 더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니, 저 어젯밤에 학교 운동장 갔다가 반호 선배 봤는데.”
방에서 거울을 보며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율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 선배, 학교 운동장 계단에서 혼자 깡소주 마시던데요?”
“소주? 운동장에서?”
“네. 혼자 궁상맞게 뭐하나 싶어서 말 걸어볼까 봐 말았어요. 저는 그 선배 좀 무서워서.”
“······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냐.”
“네?”
율희의 당황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뭘 알겠니. 그 오빠는 왜 소주를 운동장에서 먹는 거야?”
“그러니까요. 그냥 산책 갔다가 놀랐다니까요? 그 선배 요즘 좀 기분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고요.”
“그래?”
나는 빗질을 멈췄다.
“왜요? 걱정돼요?”
“아냐, 내가 그 오빠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 술을 마시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나는 다시 빗질했다. 반호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걱정되는 마음이 마른 나뭇가지에 불붙듯 확 일어났지만 애써 꾹꾹 눌렀다. 차인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궁상맞게 있는 건지. 그게 나랑 관련 없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날 우리 사이가 멀어진 밤 이후, 부쩍 반호는 혼자 다녔다.
*
[담배 돌려달라고 안해?]
전공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도형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러고 보니 도형 선배가 내 담배를 가져갔었지. 담배가 다 떨어진 뒤로 새로 담배를 사서 피우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반호에 대한 생각이 가득차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 돌려줘요.]
[거의 엎드려 절 받기네.]
도형 선배의 문자에 웃음이 났다. 보지 않아도 어디선가 툴툴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 볼까요?]
[저번에 봤던 카페에서 보자.]
*
카페 앞에 서 있으니 도형 선배가 걸어왔다.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왔어요?”
“너는 왜 연락을 안 하냐?”
“기다렸어요?”
“하, 나 원래 여자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사람 아닌데, 어이없네.”
도형 선배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를 털었다.
“담배 줘요.”
나는 손을 툭 내밀었다. 도형 선배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며칠 지났는데 저걸 피우지도,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도형 선배가 담배를 내 손에 얹어 주려다 멈췄다.
“주세요~해야지.”
“헐.”
“어서.”
짐짓 눈을 부라리는 도형 선배의 모습이 꽤 귀여워서 나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주세요.”
내가 양손을 뻗어 구부정한 자세로 말하자. 손 위에 담배가 떨어졌다. 도형 선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흡족한 듯 웃었다.
“담배 과외해준 값으로 커피 살게요.”
“너무 짠 거 아닌가? 연락하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과외해줬는데? 커피 한잔으로는 안돼. 이번 한 번 하고 앞으로 두 번 더!”
도형 선배가 손으로 브이를 하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콜. 대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나는 먼저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형 선배는 신나 보였다. 머리가 곱슬거려서 행복한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이런 사람이 여자 여럿 망가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저번에 같이 앉았던 자리에 또 앉았다.
“반호랑은 어때?”
도형 선배가 물었다. 나는 따듯한 아메리카를 마시다가 사례가 걸려 콜록거렸다.
“그렇게 자극적인 질문인가? 너도 참, 투명하네.”
도형 선배는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선배는 좀 필터 없이 말하는 것 같아요.”
“궁금한 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래도 아무도 안 미워하던데?”
도형 선배가 싱긋 웃었다. 도형 선배의 말대로 짓궂은 질문을 해도 밉지는 않았다. 저 상큼한 얼굴과 태도 때문일까.
“잘 못 지내요. 반호 선배랑.”
“흠.”
“왜 물어보는 거예요?”
“경쟁자 파악의 목적으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농담이야. 농담.”
“참나.”
도형 선배는 늘 가벼운 태도로 가끔 진지한 말을 던져서 해서 뭐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유화, 너 클럽 가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