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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13

by 청운0622 2025. 5. 31.

5: [그럴 수는 없다고]

 

 

그게 될 거 같아?”

유화야, 우리 잘 지냈잖아.”

 

그의 태연한 말에 나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안 될 것 같아.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거.”

내가 널 이성으로는 안 좋아한다 해도, 우리의 관계는 좋아했어.”

그게 더 비참해.”

 

반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어떻게 해줘?”

최대한 얘기할 일 없으면 좋겠어.”

 

그 말을 하는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반호는 내가 자기를 죄인이라도 되는 양 취급해서 억울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느낀 배신감이 너무나 컸다. 그리고, 너무 좋아했다. 그게 다 부정당한 시점에서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다. 특히 이렇게 반호를 마주보고 있을 때는 더더욱.

 

울지마, 유화야.”

 

반호가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아 내렸다.

 

이런 것도, 안했으면 좋겠어. 이런 것들 때문에 오해했으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을 내린 반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마. 나를 위한다면.”

 

나는 뒤돌아 혼자 기숙사를 향해 걸어갔다. 반호는 그 자리에 한참을 우뚝 서 있었다.

 

*

 

한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반호를 피해 다녔다. 같은 기숙사, 같은 동아리, 같은 교양 수업까지 겹치는 게 너무 많았지만 반호와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다 멀리서 반호의 시선이 따갑게 꽂혀도 모른척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반호와 자주 가던 카페를 안 가는 것뿐.

그 카페를 지나다 보면 반호가 혼자 외롭게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지나쳤다. 무의식적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반호와 나의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눈치챈 사람들이 더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니, 저 어젯밤에 학교 운동장 갔다가 반호 선배 봤는데.”

 

방에서 거울을 보며 빗으로 머리를 빗고 있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율희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 선배, 학교 운동장 계단에서 혼자 깡소주 마시던데요?”

소주? 운동장에서?”

. 혼자 궁상맞게 뭐하나 싶어서 말 걸어볼까 봐 말았어요. 저는 그 선배 좀 무서워서.”

“······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냐.”

?”

 

율희의 당황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그 사람에 대해 뭘 알겠니. 그 오빠는 왜 소주를 운동장에서 먹는 거야?”

그러니까요. 그냥 산책 갔다가 놀랐다니까요? 그 선배 요즘 좀 기분 안 좋아 보이긴 하더라고요.”

그래?”

 

나는 빗질을 멈췄다.

 

왜요? 걱정돼요?”

아냐, 내가 그 오빠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 술을 마시든 말든, 내 알 바 아냐.”

 

나는 다시 빗질했다. 반호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걱정되는 마음이 마른 나뭇가지에 불붙듯 확 일어났지만 애써 꾹꾹 눌렀다. 차인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궁상맞게 있는 건지. 그게 나랑 관련 없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날 우리 사이가 멀어진 밤 이후, 부쩍 반호는 혼자 다녔다.

 

*

 

[담배 돌려달라고 안해?]

 

전공 수업을 듣고 나오는데 도형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러고 보니 도형 선배가 내 담배를 가져갔었지. 담배가 다 떨어진 뒤로 새로 담배를 사서 피우는 바람에 잊고 있었다. 반호에 대한 생각이 가득차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 돌려줘요.]

[거의 엎드려 절 받기네.]

 

도형 선배의 문자에 웃음이 났다. 보지 않아도 어디선가 툴툴거리고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 볼까요?]

[저번에 봤던 카페에서 보자.]

 

*

 

카페 앞에 서 있으니 도형 선배가 걸어왔다. 어쩐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왔어요?”

너는 왜 연락을 안 하냐?”

기다렸어요?”

, 나 원래 여자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사람 아닌데, 어이없네.”

 

도형 선배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를 털었다.

 

담배 줘요.”

 

나는 손을 툭 내밀었다. 도형 선배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며칠 지났는데 저걸 피우지도, 버리지도 않고 가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도형 선배가 담배를 내 손에 얹어 주려다 멈췄다.

 

주세요~해야지.”

.”

어서.”

 

짐짓 눈을 부라리는 도형 선배의 모습이 꽤 귀여워서 나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주세요.”

 

내가 양손을 뻗어 구부정한 자세로 말하자. 손 위에 담배가 떨어졌다. 도형 선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흡족한 듯 웃었다.

 

담배 과외해준 값으로 커피 살게요.”

너무 짠 거 아닌가? 연락하자마자 바로 달려가서 과외해줬는데? 커피 한잔으로는 안돼. 이번 한 번 하고 앞으로 두 번 더!”

 

도형 선배가 손으로 브이를 하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 대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나는 먼저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형 선배는 신나 보였다. 머리가 곱슬거려서 행복한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이런 사람이 여자 여럿 망가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저번에 같이 앉았던 자리에 또 앉았다.

 

반호랑은 어때?”

 

도형 선배가 물었다. 나는 따듯한 아메리카를 마시다가 사례가 걸려 콜록거렸다.

 

그렇게 자극적인 질문인가? 너도 참, 투명하네.”

 

도형 선배는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선배는 좀 필터 없이 말하는 것 같아요.”

궁금한 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그래도 아무도 안 미워하던데?”

 

도형 선배가 싱긋 웃었다. 도형 선배의 말대로 짓궂은 질문을 해도 밉지는 않았다. 저 상큼한 얼굴과 태도 때문일까.

 

잘 못 지내요. 반호 선배랑.”

.”

왜 물어보는 거예요?”

경쟁자 파악의 목적으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농담이야. 농담.”

참나.”

 

도형 선배는 늘 가벼운 태도로 가끔 진지한 말을 던져서 해서 뭐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유화, 너 클럽 가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