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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나를 사랑한다 10

by 청운0622 2025. 5. 30.

 

바닥에 깔린 종이박스에는 벌써 신발 자국이 찍혀있었다. 나는 껌 하나를 계산대에 올려두고 눈으로 더듬더듬 비슷해 보이는 것을 찾았다.

 

저걸로 주세요.”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직원이 뒤돌아 담배를 하나 꺼냈다.

 

에쎄 체인지요?”

, 네 그거 맞는 거 같네요.”

 

나는 직원이 건네는 담배를 손에 쥐었다. 이제야 반호가 피우던 담배 이름을 알았다. 반호가 카페 테이블에서 담뱃갑을 치우던 잔상만으로 찾자니 맞는 걸 고르기 힘들었다.

 

나는 편의점에서 나오려다 다시 들어가서 붉은색 라이터도 샀다. 달달한 맛이 나는 껌을 씹으며 담배와 라이터를 가방 안에 넣었다. 이제 진짜 강의실에 갈 시간이다. 아마도 반호가 앉아 있을.

 

4: [신경 쓰지 마]

 

 

강의실에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늘색 남방을 입은 단정한 검은 머리. 키가 커서 그런지 앉아 있는데도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더 커서 눈에 띄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사람인데. 원래라면 반호 옆자리에 바로 앉았을 테지만, 반호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다른 줄에 앉았다.

 

교수님이 단상에 서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한소라.”

.”

한유화.”

 

이름이 불려 내가 손을 들고 대답하자 강의실 중앙에 앉아 있던 반호가 고개를 돌려 눈으로 나를 찾았다. 반호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항상 시선을 먼저 피하는 건 반호였는데 이젠 그 반대가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번에 전시회 가서 감상문 쓰는 거 잊지 않았지? 저번에 전시 희망자 명단 적은 대로 조 짰으니까 게시판 확인해.”

 

교수님이 말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저번에 반호랑 같은 전시에 이름을 적었던 게 기억이 났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뒷일 생각 안 하고 저질렀던 고백이 후회됐다. 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들려는데,

 

, 그리고 참고로 이제 조 못 바꾼다. 이제 와서 바꿔 달라고 하는 거 안돼.”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건지 단호한 교수님의 말에 나는 다시 손을 내렸다. 망했다. 어색해서 어떻게 같이 전시를 보지? 게다가 그렇게 인기 있는 전시도 아니라 조원이 많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수업 끝나기 전에 조끼리 모일 시간 줄 테니까 그때 알아서 약속 잡아라.”

 

수업 내내 칠판을 쳐다봤지만, 하나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아직 반호와 얘기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앞으로의 가시밭길이 그려졌다. 그냥 이 교양은 드랍할까? 이제 시작이니까 드랍하려면 지금 드랍하는게······. 이 수업도 서양화과 과탑인 우혁 선배가 진짜 좋다고 추천해 줘서 들은 미술 교양인데. 드랍했다고 하면 울상 지을 우혁 선배의 얼굴이 눈에 훤했다. 반호는 이번에 학점 챙길 거라고 했으니 절대 드랍 안 할 거고. 젠장, 뒷일 생각 안 하고 고백 지른 나 자신 반성해라 진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수업 끝나기 10분 전이 되었다.

 

, 이제 조끼리 모여라. 수업은 여기서 끝.”

유화야! 여기야!”

 

앞쪽에서 안면이 있는 여자 동기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그 옆에 반호와 처음 보는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나는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된 심정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가방을 놓고 나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번 주 주말 어때요? 최대한 빨리 보는 게 낫지 않아요? 감상문 쓸 시간도 필요하니까.”

그러죠

 

여자 동기가 묻자 남학생이 긍정했다. 다행히 여자 동기가 진행해서 내가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힘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면 됐다. 반호도 마찬가지로 별말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1시간 같던 10분이 지나고 대강 조별 모임이 끝났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

 

젠장, 가방 지퍼를 안 닫은 탓에 라이터가 바닥에 떨어졌다. 조원들과 반호의 시선이 일제히 라이터에 꽂혔다. 요즘 시대에 여자 가방에서 라이터나 담배가 떨어져 나왔다고 흠이 될 것도 아니라 상관없지만, 그걸 하필 내가 비흡연자인 걸 아는 반호가 본 게 문제였다. 라이터를 주우려는데 반호의 손이 더 빨랐다.

 

.”

 

허리를 숙인 반호의 눈이 왠지 좀 사나워 보였다. 아니, 복잡해 보인다 해야 맞을까. 나는 말없이 반호의 하얀 큰 손에 있는 라이터를 챙겼다. 쪽팔려서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어제 일 때문에 내가 담배에 손을 댔다고 생각하겠지. 정말이지, 오늘은 반호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유화야. 한유화!”

 

강의실을 벗어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데, 뒤에서 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못 들은 척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유화야! 잠깐만!”

 

반호가 내 손목을 잡았다. 잡힌 손목을 내치려 했지만 반호의 손이 너무 내 손목을 꽉 쥐고 있었다.

 

?”

 

정말 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몸을 돌려 반호를 마주 봤다.

 

얘기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