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선 자리에 초대받았다]
“제정신이야?”
몇 년 만에 보는 반호는 뻔뻔하게 고급 레스토랑 식탁 앞에 앉아 있다. 심지어 옷은 예전과 달리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번듯한 옷이다. 나름 성공했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걸까. 낯짝은 언제나 그렇듯 멀끔했다. 그와 앉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점점 여유가 없어졌다. 숨이 가빠졌다. 이 악연이 도무지 끊기지 않는다.
“오랜만이야.”
“왜 부른 거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파같이 푹신한 의자를 끌어서 앉았다.
“그러는 너는 왜 왔는데?”
다리를 꼬고 있는 반호는 여유로워 보였다.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전혀 꾸미지 않은 무신경한 모습, 조금은 앳된 티가 나는 모습이 익숙한데.
“무슨 장난질을 치고 싶은지 궁금해서 왔어.”
나는 반호의 앞에 있으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말투가 필요 이상으로 삐딱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얼굴이나 보려고. 추천해 준 사람 중에 너도 있길래.”
반호와 내 관계를 여기저기 알리지 않은 폐해다. 반호와 나는 엮일 연줄이 많았다. 내가 그를 만난 건 23살, 지금은 내가 26살이니, 3년 지기 지인들은 다 나와 반호를 동시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할 거라면서. 그런데 왜 날 찾아? 선이 무슨 장난이야?”
“결혼은 어차피 할거고, 너는 결혼하기 전에 한번 보고 싶어서.”
반호의 나른하고 일상적인 어조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는 하얀 식탁보를 구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나 이제 오빠 안 좋아해. 이런 식으로 자꾸 불러내지 마.”
“싫어하지는 않나 보지?”
날 선 말에도 눈치 한번 보지 않고 단순하게 말을 바꿔버리는 반호를 보며 나는 대답할 의지를 잃었다. 나는 직원이 가져다준 와인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친구 하자며, 그러기로 했잖아.”
“네가 먼저 그랬잖아. 결혼할 사람 없으면 나랑 하자고.”
반호는 내가 수치스러웠던 일에 대해선 지나치게 기억력이 좋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주제에 내가 한 말을 잘도 기억했다.
“거절한 건 오빠야.”
“거절 안 했어. 대답을 안 했을 뿐이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말갛고 하얀 얼굴로 반호가 또 웃는다. 나는 또 서러워졌다.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다. 뜨거운 태양 빛이 쏟아지는 환한 낮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인생이 쉽나 봐 아주. 아님 내가 쉽나?”
“네가 어떻게 쉬워. 너 되게 안 쉬워.”
비꼬듯 말해도 반호는 개의치 않고 잘 받아쳤다. 분해서 반호를 노려보자 시종일관 즐거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조금은 난처해졌다. 더 이야기해 봤자 나만 말려들 것 같아 내가 의자에 걸어둔 가방끈을 빼 들자 반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갑자기 부탁하듯이 그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기왕 온 거 밥 먹고 가. 오랜만에 얘기도 하고. 너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어. 연락 완전히 끊겼었잖아.”
“오빠는 자기를 찬 사람이랑 멀쩡하게 관계 유지할 수 있어? 안 하고 사는 게 답이지.”
“너 예전에 나 찾아왔잖아. 계속 관계 유지하자고.”
“진짜······사람 미치게 하는데 뭐 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반호의 앞에서 미련 없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뜨거운 무기력함을 느끼며 나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목이 메여 말소리가 잠겼다. 반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테이블보를 가볍게 매만졌다.
“넌 참 재미있어. 언제나 그랬지. 나이 들어도 변한 게 없네.”
반호의 말에 화가 치밀었지만, 동시에 가슴이 미어졌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낯익은 태도에 대책 없이 나는 빠져들고 있었다.
“선도 보는데 그냥 우리 결혼할래?”
나는 반호를 힐끗 보고나서 그냥 웃었다. 이제 화도 안 났다. 그저 허탈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하지 좀 마.”
“농담 아니야. 내가 여자 친구도 없는데 누굴 만나겠어. 결혼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이제 와서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말하자 반호는 내 잔을 끌어와 와인를 따라 주었다. 붉은빛이 반호의 하얀 얼굴을 물들였다.
“그냥 하고 싶은 말한거야. 너도 생각해 봐. 우리가 결혼하는 게 나쁘진 않잖아.”
그 말을 하는 반호의 눈빛이 너무 진실해 보여서 하마터면 동조할 뻔했다. 하지만 예전에 반호 때문에 겪은 아픔을 생각한다면 분명, 쉽게 그러자고 하며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난 오빠랑 결혼 못 해. 이미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럼, 계속 친구 할까?”
반호가 괜히 어조를 가볍게 해 장난스레 물었다.
“같이 선보는 친구가 어디 있어?”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그렇지.”
반호는 깊이 생각에 잠긴 채 거의 먹지 않은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작게 썰었다. 나 역시 반호의 침묵에 맞추어 천천히 의미 없는 나이프 질을 했다. 반호는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오늘 본 것 중 가장 장난기를 빼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제야 난, 안정을 찾았어. 쫓기듯이 살다가. 바빠서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왔는데······네가 날 못 잊듯이 나도 널 못 잊겠더라.”
나는 반호를 괴롭혔던 부담감을 안다. 그러나 내가 오늘 그걸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날카롭게 대꾸했다.
“나는 지금이라도 다시 해보고 싶어. 너도 알잖아. 너는 날 좋아했고, 나도 널 좋아했어. 우리는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이야.”
“······됐어. 그만해. 그만, 그만 말해.”
나는 반호의 말을 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절절한 말에 너무 혼란스러워 속이 안 좋을 지경이었다. 내가 일어나자 반호도 따라 일어나며 내 손목을 잡았다.
“가지마, 유화야.”
반호가 조금은 붉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반호의 손아귀에 잡힌 채 나는 엉겨 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우리 서로 상처만 줬잖아. 그때 난, 정말 힘들었어. 지금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야. 또 그런 걸 반복하고 싶지 않아.”
“이제는 다를 거야.”
반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배어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머리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불씨가 남아있었나 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우리, 서로를 잘 알고 있잖아. 유화야, 제발.”
반호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면서. 반호와의 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3년 전, 대학교 4학년의 봄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