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들어온 이래로 태우는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윤이 태우 옆에 앉았다. 윤은 마르고 얼굴이 흰 아이였다. 병약해 보이기보단 예민하고 날이 선 인상이었다.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으로 자기 허벅지를 연신 짓누르는 게 영 불안해 보였다.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이 여기저기 웃돌았다.
“선배, 이 누나가 우리 연극하는 거 도와주기로 했어요.”
태우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나를 소개했다. 윤은 내 뺨 언저리를 쳐다보다 뒤늦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구면인 건 눈치챈 것 같았다.
“태우가 반 협박해서 하는 거긴 하지만, 잘 부탁해. 잘해보자. 기왕 하는 거.”
내가 말했다. 내가 태우가 어떻게 연극을 구상할지 말하는 동안 윤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종종 고개를 끄덕이거나 태우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 외에는.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태우와 구상을 어느 정도 끝내고 나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카페를 나서기 전 윤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 했다. 태우와 나는 커피잔을 정리하고 먼저 카페 밖에 나와 윤을 기다렸다.
“쟤. 좀 불안해 보인다.”
“그 일 있고 나서 더 그래.”
태우가 걱정스레 말했다.
“네가 잘 챙겨줘. 말 안해도 잘 챙기는 것 같긴 하지만.”
“누나 챙겨줄 태현이 형은 없네. 어떡하냐?”
“새끼가 잘 가다가 태현이 얘기는 왜 꺼내?”
“누나, 그 정도면 사랑이야.”
“......그 생각을 내가 안해봤겠어? 차라리 사랑이었으면 좋았겠지. 우정이니까 더 못 놓고 있잖아.”
윤이 카페 문을 열고 나오자 태우가 윤을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이 정다워 보였다.
이렇게 노을이 붉은 시간에 정다울 수 있는 사람들은 함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런 시간에 쉽게 외로워졌다. 이 시간을 기점으로 어둠이 찾아오면 나는 또 누군가를 그리워해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
*
[Flu in the forest]
반호가 기숙사에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일이라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과 동시에 그가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 식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당황해 밥알을 제대로 씹지도 못했다. 옆에서 종알거리던 친한 동생에게도 건성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한 달은 더 있어야 올 줄 알았다. 친척 일을 도와준다고 학기가 시작하고 다른 학생들보다 늦게 오곤 했으니.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른 때보다 훨씬 빨리 왔다.
“언제 왔어?”
반호가 내가 있는 숲으로 왔다. 내가 있든 없든 그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왔을 것이다. 언제나와 같이 검은 옷을 입고,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길어진 뒷머리로. 나에 대한 무관심을 표현이라도 하듯이 못생긴 외투를 걸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내게 상처 준 적 없다는 듯 푸름이 짙어지고 있는 숲속 길 끝에서 긴 다리로 걸어왔다. 나는 낮은 돌담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두 시간 전에?”
반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반호는 큰손으로 그의 얼굴에 달라붙으려는 날파리를 쫓으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가 내게 온다는 연락을 하지 않은 게 우리가 이 정도의 사이밖에 되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운해서 그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일은 다 끝났어?”
나는 허리를 굽혀 무릎의 흙먼지를 털고 일어나 나의 다정을 꺼내주었다. 간을 빼어 내밀 듯이.
“그냥, 뭐. 잠깐 쉬러 온 거야.”
그가 살짝 웃고 나를 지나쳐 숲길 끝과 이어진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그의 무심한 말에 힘이 절로 빠졌다. 감기몸살에 걸린 사람처럼 나는 다리를 후들거리고 이마를 짚고 싶었다.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내 두 다리는 멀쩡히 서 있었다. 이마만 짚었을 뿐이다. 차라리 아프고 싶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 물리적인 아픔일 뿐이라고 단정하고 싶었다.
내 곁을 지나가다 스치는 듯 ‘내가 그리웠어?’라고 묻는 반호의 눈빛. 나와 달리 멀쩡하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눈빛의 저의를 제멋대로 해석했다.
‘글쎄, 그랬던 것 같아.’
나는 그가 묻지 않을 질문을 위해 대답했다.
반호를 안 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반호에 대한 내 감정의 무게를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뛰고, 어지럽고, 미웠다. 배에 타서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이 감정의 이름을 나는 안다. 반호를 다시 보니까 알겠다. 피하고 싶었을 뿐. 사실, 당신이 많이 그리웠구나. 오래도록, 잔잔하게. 파도가 일렁이지 않도록 마음을 잠재워 왔구나.
기숙사 문이 잠길 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반호를 재회한 후로 주체할 수 없이 그간 방치했던 감정이 일순간 흘러넘쳤다.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게 무서웠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이 가까이 있었는데도 모른 척하고 살았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반호와 나 사이에는 늘 조금이라도 묘한 기류가 흘렀다. 영으로 수렴하지 못할 감정이 탈 없이 지나가길 바라며 방치했었다.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형사처럼 나는 빛이 거두어져 짙은 색으로 변해가는 숲에서 흙냄새를 맡으며 반호와 있었던 지난날을 생각했다.
당신 눈에 비친 나는 어땠을까. 나도 당신에게 애매모호하고, 일상적이고, 쉽게 호의를 베풀며 다정한 말을 해주었어?
나는 손으로 잘근잘근 찢으며 괴롭히던 나뭇잎을 땅에 내던지고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리, 같은 마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내가 용기 낼 수 있을 텐데.
마른세수를 한 얼굴에서 풀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