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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이유를 찾아서 1

by 청운0622 2025. 6. 10.

 -태현에게

  안녕, 너는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겠지. 나는 그러지 못해. 알잖니, 나는 강인한 사람이 아니야.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일 때면 사무치게 외로워하는 사람이지. 
  왜인지 너는, 말하지 않아도 내가 가장 위태로울 때, 내가 가장 간절할 때 나를 찾아와줬어. 나도 몰랐던 내 간절한 때에 말이야. 지나고 보니 신기해. 
  넌 제멋대로 나를 떠났지만, 나도 제멋대로인 건 마찬가지이니 더 탓하지 않을게. 

  -청운 


[기시감]


  나는 육교를 걸을 때면 늘 몸이 저릿저릿하다. 육교 너머 차들이 달리는 걸 곁눈질하며 눈을 깜빡이고 주먹을 쉴 새 없이 피었다 쥐었다 해야 했다. 이상한 일이다. 고소공포증도 없는데 육교만 올라가면 피가 느리게 흐르는 기분에 휩싸이니 말이다. 그러다 육교에서 이상한 여자애 하나를 만났다. 

  붉은빛이 하늘을 좀먹고 있을 즈음 음악학원을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나 집에 다다를 쯤엔 나는 녹초가 되었다. ‘또 이렇게 하루가 갔네’ 하며 지친 몸으로 육교 계단을 터덜터덜 올라가며 육교 난간 너머에 시선을 던졌다. 내가 늘 하늘을 구경하던 곳에 웬 뒷모습이 야윈 여자애 하나가 연두색 난간에 양손을 짚고 기대 서 있었다. 
  새하얀 교복 와이셔츠를 입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묘했다. 유독 가는 체구 때문에 더 위태로워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내가 노을을 보는 공간이 불청객으로 가려진 것에 신경이 쓰였다. 생판 남에게 관심을 많이 줘봤자 좋을 거 없다. 그런데 내가 걸음을 내딛을수록 그 여자애의 몸이 점점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경치 구경한다고 하기엔 지나친 각도의 기울임이었다. 

  어둠 속 붉게 번지는 자동차 불빛과 진회색의 딱딱한 차도. 그래, 그 차도를 상기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 여자애의 뒤로 가 와이셔츠를 확 잡아당겼다. 여자애가 내 다급한 행동에 딸려 올라왔다. 휘둥그레진 여자애의 눈과 마주치자 나는 그제야 내가 과민반응을 했다는 것은 알아챘다. 나는 황급히 옷자락을 놓았다. 이미 여자애의 와이셔츠는 교복 치마에서 빠져나온 후였다. 여자애는 그대로 얼어붙어 나와 자기 옆의 도로를 번갈아 봤다. 

  “그냥, 구경한 거에요.”
  여자애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 서둘러 나를 지나쳐 갔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멀쩡한 애를 자살시도자로 본 것 같아 민망했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애가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그런데 후회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 애의 눈이 퀭하고 뺨이 움푹 파인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길을 갔다. 내 앞에서 여고생들이 남색 체육복을 입고 서로 깔깔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

  인연이란 건 신기한 것이다. 이렇게 엮이나 의문이 들 정도로 강하게 얽히니까. 

  숲길에서 담배를 피고 있다가 태우의 전화를 받았다. 정확히는, 피려고 했다. 반호가 남긴 건 자주 피던 담배 몇 개비와 씁쓸함이었다. 반호는 대학교 연합기숙사에 같이 살던 남학생이었다. 어쩌다보니 기숙사 식당에서 마주칠 때 시답지 않은 농담이나 주고받다가 친해졌다. 애초에 친해도 서로 맘을 주지 않는 애매한 사이였으니 이러나저러나 별로 아쉬울 것도 없겠다 생각했지만, 아니었나 보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커피 뚜껑을 열어 벌컥벌컥 마시고 어중간하게 커피가 남은 플라스틱 컵에 불이 붙은 담배를 그대로 꼬라박았다. 좆같다, 기분이. 담뱃불이 힘없이 피시식 꺼졌다. 새소리가 들리는 숲길에서 쭈그려 앉아 나는 욕을 했다. 그가 남기고 간 담배를 나는 제대로 피우지도 못하고 구정물에 던졌다.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내게 확신을 주지 않는 상대는 사랑하기 어려웠다. 먼저 마음 내주기 두려워 애매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 별로 할 말은 없었지만. 그는 기숙사에 있다가 불현듯 다른 지역으로 떠갔다. 내게 잘 있으라던가, 언제 돌아온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떠나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을까.’ 
  나는 담배 대신 애꿎은 내 입술을 물었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푹 처박고 돌멩이 사이를 날아다니는 날벌레나 쳐다보고 있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태우였다. 

  강태현 사촌동생 태우. 퍼뜩 정신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어, 태우야. 웬일이야?”
  “누나. 그러게. 오랜만이지? 잘 지내?”
  머쓱하게 뒷목이라도 긁고 있는지 태우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 뭐, 부탁할게 좀 있어서.”
  태우가 내게 만나자고 했다. 강태현이 유학 간 이후로 태우를 볼 일이 없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예전엔 태현과 내가 놀 때 태우가 끼어서 종종 같이 놀곤 했다. 만나자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카페에서 초초하게 내 눈치를 보던 태우는 대뜸 두꺼운 공책과 프린트 뭉치를 꺼내 내 앞에 하나씩 턱턱 내밀었다. 

  “뭐, 어떻게 하라고. 첨삭해줘? 자소서 쓰냐?”
  “아니, 그거 말고. 누나, 나 연극부잖아.” 
  밑밭부터 까는 게 수상해 나는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물렀다. 태우는 한쪽 다리를 덜덜 떨었다. 
  “누나! 나 연극 대본 쓰는 거 도와주라.”
  “아, 왜? 싫어.”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열심히 빨아먹다 말고 빨대를 뱉자 태우가 간절하게 내게 다가왔다. 
  “아니, 누나.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오랜만에 만난 동생한테. 생각을 좀 해봐.”
  “네가 강태현 동생이지 내 동생이냐? 그리고 나 노래 가사나 쓰지 연극 대본 같은 건 잘 못써.”
  매정한 내 대답에 태우가 침을 한번 삼켰다. 
  “그래도 누나는 글재주가 있잖아. 금방 쓸걸? 누나 나 알잖아. 아이디어는 많은데 진득하게는 못하는 거.”
  “그럼 연기나 계속하지 뭐하러 또 대본을 새로 써?”
  “아 이번 꺼는 우리가......아니 아무튼 제대로 써야 해.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태우야. 나는 음악 쪽이야. 글은 무슨 글. 해줄 사람이 그리 없어? 연극부원들 있을 거 아냐?”
  “누나, 나 진짜 이번 꺼 거의 햄릿 급으로 만들 수 있어. 너무 대작이라 그런 조무래기들이 끼면 안돼.”
  “어이가 없네.”
  태우가 종이뭉텅이를 소중히 부여잡고 더욱 불쌍한 눈을 해보였다. 아무튼, 비언어적 표현에 능한 놈이다. 
  “들어나 보자.” 
  내 대답에 태우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그때, 뒤에서 수다를 떠는 아줌마 무리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커피를 내리는 소리보다 훨씬 컸다. 저 아줌마들은 뭐가 그리 재밌을까. 그 바람에 태우의 목소리가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나는 태우를 데리고 카페의 테라스로 나왔다. 벽에 나란히 태우와 기대섰다. 이러고 있으니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나는 코끝을 찡그렸다. 

  “담배 피우고 싶으면 펴.”
  “어? 아냐 누나. 괜찮아.”
  태우가 손사래를 쳤다. 
  “뻥치지 말고. 너 계속 손톱 물어뜯던데. 강태현도 담배 끊으려다 결국 못 끊더라.”
  “에이, 그래도 누나 앞에서 어떻게 펴? 난 끊을 거야. 윤 선배가 담배 냄새 싫어하는 것 같아서.”
  “대-애-단한 우정이다.” 
  우정 운운하며 비아냥대도 태우는 실실 쪼개고 있었다. 
  “그래서, 윤. 걔가 뭐 어떤데?”

  태우는 내게 학교 선생을 풍자하는 연극을 하자고 했다. 친구가 상처받은 걸 복수해주고 싶다며 태우는 윤이라는 아이의 일을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꽤 낭만적인 발상이라 관심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아버지를 죽인 이의 죄책감을 증폭 시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의미심장한 연극을 한 햄릿. 치기 어린 발상은 나를 들뜨게 했다.

  “태우야. 근데 나 무보수로 일 안해. 열정페이 그딴 거 안해, 나는. 연극 대본 쓰는 게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니고.”
  나를 보고 태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태현이 형 어디 있는 지 알려줄게. 집주소로. 딜?”
  “야, 너 태현이 지금 어딨는지 알아? 아, 사촌이니까....... 근데 그걸로 퉁친다고?”
  “누나, 난 누나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 태현이 형, 누나한테 말도 안하고 유학 갔다던데. 그 형도 진짜......그렇게 누나한테 잘해줬으면서 그러냐. 사람 그렇게 안봤는데.”
  “네 알 바 아냐.”
  “솔직히 보고 싶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왜 말을 아끼는지 뻔히 알면서 떠보려고 빙글빙글 웃는 게 얄미웠다. 태우나 강태현이나 사람 속을 잘 들여다보는 편이었고 그만큼 속도 잘 뒤집어 놓았다. 
  나는 내 서랍장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편지라고 치기에도 민망한 일기 같은 편지들이었다. 보낼 거라 생각 안했고, 애초에 수신인 주소도 모르는지라 내 서랍장에서 부피만 늘리고 있었다. 그것들을 보면 체한 것처럼 불쾌해졌지만 끝내 서랍을 비우지 못했다. 의미 없는 짓거리를 멈추지 못한 내 미련함이 서랍을 가득 채웠다. 

  “지금 알려줘?”
  “......아니.”
  미뤄왔던 숙제 같은 편지들에 대한 변명이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워졌다. 어디서 뭘 하는지, 잘 지내는지, 내가 그립지는 않은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질문에 대한 간절함이 커졌지만 거센 물살이 넘어올 듯한 둑을 건드리기에는 위험부담이 컸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꼈는지 태우는 나를 놀리는 걸 그만뒀다. 한참 떠들던 아줌마 무리가 나가는 걸 보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그럼, 대본 다 쓰면 알려줄게. 그럼 됐지?” 
  태우가 의자를 빼 앉으며 씩 웃었다.  
  “딸랑 주소 하나 알려주는 거로 뭐 그리 당당하냐?”
  “나중에 성공하면 돈 많이 줄게. 누나.”
  태우가 미안한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됐네, 새끼야. 그날을 언제 기다려.”
  “그럼 해주는 거다? 역시 누나는 천사야.”
  빈말하지 말라고 태우에게 핀잔을 줬지만, 간만에 웃음이 비실비실 나왔다. 태우가 왜 마당발이라고 불리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태우랑 한참 입씨름을 하며 놀고 있는데 카페 종소리를 울렸다. 태우가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선배 여기예요!”
  얼떨결에 나도 종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페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얀 손이 눈길을 끌었다. 

  그 애를 만난 두 번째 날이었다. 육교에서 위험하게 몸을 기울이던 아이. 아마도 내가 한번 구했던 아이. 그리고 또 한 번 구하게 될 아이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일이 그렇듯.